안토니오 네그리의 <예술과 다중> <다중>

커피향 그윽한 이야기 2011. 1. 28. 14:18

현재 맑스에서 들뢰즈, 마키아벨리부터 데카르트` 스피노자를 아우르는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받는 네그리.

그의 <예술과 다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서 <제국>과 <제국>의 속편인 <다중>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제국>에서 네그리의 출발점은,

전지구적 질서가 근대 권력들에 의해 실천되었던 제국주의라는 용어로는 더 이상 적실하게 이해될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그것을 대신하여 지금은 '네트워크 권력'이 새로운 주권형태로 출현하고 있는데,

이 네트워크 권력은 '제국적'이지만 '제국주의적'이지는 않다.
그렇다고 제국의 네트워크 속에 있는 모든 권력들이 평등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국민국가들은 거대한 권력을 갖고 있고 또 어떤 국민국가들은 권력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다양한 기업들이나 기관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러한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그 국민국가들은 현재의 전지구적 질서를 창조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그 질서 내부의 구분들과 위계들에도 불구하고 서로 협력해야만 한다.

<다중>은 민중, 대중 그리고 노동계급과 같은 여타의 사회적 주체들과 구별된다.

전통적으로 민중은 통일의 관점에서 파악된 것이다.

민중은 다양성을 통일성으로 환원하여 인구를 하나의 동일성으로 만든다.

'민중'은 하나이다. 이와는 달리 다중은 다수이다.

다양한 문화들, 인종들, 민족들, 성별들 등 다중이 이 모든 차이들의 다양체이다.

대중도 또한 민중과 대비된다.

대중 역시 하나의 통일성이나 하나의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중의 본질은 무차별성이다.

다중에서는 사회적 차이들을 서로 다른 상태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다중 개념에 의해 제기된 도전은

사회적 다양체가 내부적으로는 다르게 남아 있으면서도

공동으로 소통하고 공동으로 활동하는 것이 성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끝으로 노동계급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일할 필요가 없는 소유주들과 노동자를 구별할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을 노동을 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분리한다.

가장 넓은 의미로 사용될 때 노동계급은 모든 임금노동자를 지칭힌다.

이와는 달리 다중은 개방적이고 포함적인 개념이다.

인터넷과 같은 분산된 네트워크는 다중의 최초의 이미지나 최초의 모델로 훌륭하다.

여러 마디들이 다르게 남아 있으나 그 모두가 웹에서 서로 접속되기 때문이며,

네트워크의 외부적 경계가 열려 있어서 새로운 마디들과 새로운 관계들이 언제든지 추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중은 대안적인 전지구적 사회를 창조하기 위하여 제국을 관통해서 움직이고 있다.

부르주아지나 다른 모든 배타적이고 한정적인 계급형성체들과는 달리

다중은 사회를 자율적으로 형성할 수 있다.

이것이 다중의 민주적 가능성의 핵심적인 것이다.


이제 <예술과 다중>으로 넘어가보자.
네그리가 처음 이 책을 낸 것은 1988년이다.

지금은 말할 것도 없이 이미 그 당시 세계는 완전하게 물상화, 추상화되었다.

그러한 정황에서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1970년대의 혁명적 시도가 실패로 끝난 후의 신자유주의적인 재건의 한복판,

생산의 모든 영역과 지구상의 모든 공간에 자본주의가 정치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1980년대의 한복판에서

모두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까.

점점 강하게 조여 오는 온갖 시장제도들로 이루어진 이 우주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예술도 이러한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고 느낀 네그리는

예술의 생산양식이 장인적 실천과 물상화된 상상력을 통해 평탄화되어 버렸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흉내 내고 있음을 얘기한다.

우리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예술을 고찰해볼 때,

예술이 상품 세계 안으로 들어와 있다고 하는 사실은 이미 더 이상 충격을 주지 못한다.

예술은 압축된 이 세계의 내부에 있고 또 이 세계는 자본주의의 수중에 갇혀 있으며

게다가 그것이 정신적 스캔들이나 논리적 폐쇄감을 불러 일으켜 왔다고 하는 것 또한 그다지 무서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내부에서야말로 상품의 압도적 폭력과의 대결에서야말로

예술가의 살아 있는 노동은 때때로 아름다움의 양상을 드러내 왔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예술이란 노동이며 살아 있는 노동이다.

따라서 예술은 여러 가지 특이한 형상이나 오브제를 발명하는 것이며 언어적 표현이고 여러 가지 기호들을 발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적 경험은 노동의 각 변형 양식에 대한 분석으로 귀착된다.

네그리에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세계의 구축에 참여하는 각각의 주체로 이루어지는 다양체 내에서

순환하고 공통적인 것으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특이성을 발명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이루어진 상상력을 일컫는 것이다.

예술이란 그런 의미에서 다중이다.

네그리에게 전위(avant-garde)란,

대중의 외부에 있으면서 이것을 위로부터 지도하고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그 자체의 내부에서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위가 예술이며 예술이 전위라고 한다면

"전위=대중"으로서의 '대중 전위'란, "예술=대중" 즉 우리들 각자의 생산 활동이 예술이어야 한다는 것,

혹은 우리들 각자가 예외 없이 모두 예술가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 전위"란 우리들 각자가 문자 그대로 예술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은 천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예술은 만인이 천사라고 하는 단언이며

또 이는 매 순간 재발견되어야 하는 사실이라고 단언하는 것"

이라고 네그리는 지인에게 서신을 통해 이야기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천사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대중 전위"라는 개념을 통해 네그리가 제기하는 문제,

"자본의 실질적이고 총체적인 포섭이 현실화되고 말았을때 예술의 자기가치화는 반란을" 일으킨다.

<예술과 다중>은

"다가올 인민"으로서의 "예술=다중"에게 보내는

존재론적이며 유물론적인 저항과 혁명을 호소하는 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