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nosis

커피향 그윽한 이야기 2005. 1. 4. 17:08

어원은 그리스어로서 인식(), 앎, 지식 또는 깨달음[]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그 종교적이고 복합적인 의미 때문에 보통 그노시스, 영지라고 한다. 그노시스는 구원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믿음과 대등한 개념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믿음보다 더 중요하고 앞설 뿐만 아니라 믿음을 능가하는 높은 차원의 단계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교회 안팎에서 많은 논쟁과 이론이 생기게 되었고, 또 온갖 가정과 추리가 속출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노시스는 그 단어가 지닌 복합적 의미 때문에 번역할 수 없는 것이다. 초기의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천상적 신비에 대한 인식이나 깨달음을 그노시스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반면 이단학파에서는 이를 밀교적 인식으로 이해하여 선택된 소수만의 특권으로 받아들였다.

그리스 철학은 완벽한 것에서 유출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의 신에서 조금 열등한 신이 생기고 또 거기서 다음 단계의 것이 유출되고
이런 식으로 유출의 맨 마지막 단계가 육체, 육신입니다.
여기서 이원론적 사고 방식이 생기는 것인데, 영혼은 선하고, 육신은 더러운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관점으로 유대인의 여호와는 궁극의 존재가 아닌 유출의 몇 단계 후의 것으로 보고,
또 이러한 바탕에서 예수의 육화와 죽음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너무나 방대한 표현을 가지기에 아직까지도 영지주의는 이것이다 라는 단언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대표적 그노시스주의자인 발렌티누스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요소, 즉 물질과 정신, 영적인 것이 존재한다. 여기서 영적인 요소는 하느님도 모르게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으로, 이 영적 요소가 바로 하느님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내적인 힘이며 원동력이다. 구원이란 바로 이것을 통하여 물질로부터의 해방과 탈출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람에게도 세 가지 부류가 있는데, 육체적 인간, 정신적 인간, 영적 인간이 그것이다.

육체적 인간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영적 인간만이 구원될 수 있다. 정신적 인간은 어렵지만 그래도 그노시스와 예수를 본받는 실천을 통해 구원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노시스 사상의 체계는, 첫째 이원론적 우주관 아래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의 이어질 수 없는 심연의 관계에서 우주를 고찰하고, 둘째 제2급의 신에 의해 창조된 물질은 무질서에 의한 싸움과 타락 등으로 생겨난 결과로서 악이라는 것이며, 셋째 인간은 대부분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졌으나 그 중 소수의 선택된 사람만이 영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그것이 바로 구원과 해방의 원동력이라는 것, 그리고 각 차원의 세계에는 모두 중개자가 있어 이 중개자를 통하여 상급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교 이전의 유대교에서부터 그 형태를 볼 수 있는 그노시스 사상은 이원론적 우주관 아래 동방의 종교 사상과 이교 철학, 그리스 신화, 점성학 등의 내용이 그리스도교 교리와 무분별하게 혼합된 것으로, 참된 인식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도 매력을 주는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 또한 우리에게 성부를 계시하였다. 이 때문에 초기 교회에서 그노시스주의는 오랫동안 교회 내부 깊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때로는 진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혼선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영생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라는 요한의 복음서의 말이라든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테오필루스 등의 ‘그리스도교인은 참된 지식, 즉 그노시스를 지닌 사람들이다’라는 설명이 단적인 예이다. 따라서 정통적 입장에서의 그노시스와 이단 사상의 거짓 그노시스주의를 뚜렷이 구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교인의 입장에서 그노시스주의가 이단으로 탈선하게 한 것은 이레나이우스 등의 교부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세상과 역사, 그리고 물질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그노시스주의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근본적 요소인 예수의 강생 그 자체와 의미를 부인하고, 그 역사적 사실과 함께 인성()을 취한 구원의 방법을 송두리째 부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스도가 실제로 육신을 취한 것이 아니고 다만 가현(假現)이라는 주장으로 인해 초기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와 신앙에 모순되어 정통파로부터 부정·이단시되었다.


세피로트마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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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firot

커피향 그윽한 이야기 2005. 1. 4. 14:57

하나는 히브리어인 Sappier(청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Sappier란 창조때 하나님이 뿜어낸 광선의 빛깔을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한가지 설은 수를 나타내는 헤브라이어 Safier에서 유래 되었다는 것으로 헤아린다" 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각각의 세피로트마다 숫자가 매겨진 원칙들이 있고 10개의 광선과 22개의 알파벳 문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빛이나 사상 혹은 형태를 나타내는 세피로트는 10개였으며 여기서 모든 사물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카발라에 따르면 근원의 수 1은 열개의 세피로트로 분할된다. 세피로트들은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결합되고 작용 하는데, 헤브라이 알파벳의 22자는 각각의 세피라 (세피로트의 복수형)들 사이의 연결 역활을 한다.

첫번째 세피라는 케테르(왕관)이다. 케테르는 호호마(지혜)와 비나(지성)로 나뉘어 진다. 네번째 세피라는 헤세드(사랑) 혹은 게둘라(위대함)로 나뉘어진다. 다섯번째 세피라는 게부라(정의), 여섯번째는 타파렛(아름다움), 일곱번째는 네차하(승리)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덟번째 세피라는 호드(화려함), 아홉번째는 에소드(토대), 열번째는 말후트(왕국 혹은 현실)를 나타낸다.

이 가운데 마지막 열번째는 이 세상에서 사현한 여호와 셰하나와 동일시 한다. 카발라에서의 세피로트이 나무는 이외에도 여러가지 형태로 이용되는데, 이것은 거의 대부분이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 부적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즉, 세피로트의 배열과 그 연결의 방법은 그노시스주의에서 말하는 신의 지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완벽한 세피로트이 나무를 완성하는 것은 바로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지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세피로트의 나무의 완성은 신의 지를 얻어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 외에, 새로운 세계의 생성을 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여기에 몇가지 덧붙여 말하자면 카발라에서는 이 로고스 혹은 원이념으로 해석될 수 있을 이 열개의세피라의 배열에 따라 최초의 신성한 세계인 앗살루트가 형성 되었다. 마찬가지로 열개의 세피로트에 의존하는 다른 세계가 더 생겨났는데 그것은 창조와 천체의 세계인 베리아와 영이나 천사들과 같이 천상을 활기있게 하는 피조물 이루어진 엣시라, 마지막으로 질료(물질)의 세계인 아시야라고 한다.


두번째 연구


'생명의 나무'는 일반적으로 낙원의 중심에 있으며 재생, 원초의 완전성으로의 회귀를 나타낸다. '생명의 나무'는 우주축이며, 선악을 초월한 일원적인 존재이다. '생명의 나무'는 또한 하나의 순환의 시작과 끝을 나타낸다.

'생명의 나무'에는 12개(어떤 경우에는 10개)의 열매가 있는데 이것은 태양의 열두가지의 모습을 나타내며, 한 순환 주기의 끝에 '하나'의 현현과 동시에 나타난다. 생명의 나무의 열매를 먹거나, 혹은 그 나무의 즙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예를 들면 도교나 선교에서 '서방정토' 한가운데서 자라는 불사의 복숭아 열매를 먹거나 또는 이란의 하오마나 이것으로 만든 하오마주를 마시는 자는 불사의 인간이 된다.

'거꾸로 된 나무'는 천계와 하계가 서로 다른 것을 비쳐서 합치는 거울을 가리키는 의미이며, 또한 지식을 그 근원에서 정리하는 것을 나타낸다. 혹은 태양빛이 대지에 내리는 것, 하늘의 힘이 하계로 뻗침, 즉 광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니시에이션 의례에서 '거꾸로 된 나무'는 상반됨, 역전, 이니시에이션을 받는 신참자의 죽음을 나타낸.
납골 항아리에 그려진 '거꾸로 된 나무'는 죽음을 의미한다.

'세피로트 나무'는 종종 거꾸로 그려진다. 고대 근동에서 '생명의 나무'는 우주의 재생을 상징한다. 이 나무의 일곱개의 가지는 일곱개의 혹성과 일곱하늘을 상징한다. 바빌로니아에서 '생명의 나무'는 우주의 회전축이며, 그 가지는 라피스 라즐리로 되어 있고, 멋진 열매가 달린다. 바빌로니아, 프리기아, 칼데아에서는 야자나무가, 앗시리아에서는 포도나무가 '생명의 나무'로 여겨졌다. 중국에서 '생명의 나무'로 여겨지는 것은 복숭아나무, 뽕나무, 매화나무 등 다양하다. 대만과 미아오족에서는 대나무가 '생명의 나무'이다. '감로나무'인 '생명의 나무'는 '우주축'인 성산 곤륜의 정상에서 자란다.

이집트에서 '생명의 나무'인 무화과나무는 성스러운 팔이 있으며, 은혜가 가지에 열려 있다. 또한 나무의 가지에 달린 그릇에서 풍요의 물이 흘러나온다. 여신 하토르는 자양분을 내리는 나무, 그래서 생존을 의미하는 나무로 그려질 수 있다. 유대교에서 '신의 나무'는 창조세계, 현현세계를 나타낸다. '빛의 이슬'은 사자에게 부활의 힘을 주는 '생명의 나무'에서 솟아난다.

'세피로트의 나무'에는 이원성을 나타내는 좌우의 원주가 있는데, 이원성의 조화와 통일의 회복을 나타내는 것은 중앙의 원주이다. '세피로트의 나무'는 종종 '거꾸로 된 나무'로 그려진다. '생명의 나무는 위에서 아래쪽으로 뻗어 있으며, 만물을 비추어주는 태양이다'(조하르). '세피로트의 나무'는 그 자신이 거대한 상징성을 가진다.

유대교의 '생명의 나무'는 '성도'의 중앙에서 자란다. 힌두교에서 '생명의 나무'는 아디티(산스크리스트어로는 순진무구, 무한), 즉 개성의 본질이다. 이란에서는 아몬드 나무가 '생명의 나무'이다. 미트라신앙에서 생명의 나무는 소나무이다. 북유럽에서는 '이그드라실'이나 물푸레나무가 '생명의 나무'이고 생명의 근원이다. 샤머니즘에서는 일곱개의 가지가 달린 자작나무가 '생명의 나무'이다.

그 나무는 일곱개의 혹성과 샤만이 하늘로 올라가는 일곱개의 계단을 상징한다. 자작나무의 가지는 별이 빛나는 하늘의 궁륭이다. 게르만에서는 보탄신의 전나무가 '생명의 나무'이다. 나중에는 라임이나 린덴(보리수)으로 변했다.

다시 말해서 제레의 목표인 인류 보완 계획(인류를 하나의 완전한 개체로 만드는 것) 은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세피로트 나무의 완성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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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커피향 그윽한 이야기 2005. 1. 4. 14:40

뉴에이지라는 개념의 어원은 점성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점성학에서는 태양과 여러 행성에서 일어나는 회전순환운동이 한 궤도를 완전히 마치려면 약 2만 6,000년의 시간이 걸리며 이 궤도를 황도(黃道)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시 12좌로 나뉘는데 별자리인 사자 ■게 ■쌍둥이 ■황소 ■양 ■물고기 ■물병 ■염소 ■궁수 ■전갈 ■천칭 ■처녀를 황도12궁이라고 합니다.
이 한 좌(座)에서 다른 좌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2,100년이 걸리는데 이것을 에이지(age), 즉 한 세대나 황도라고 합니다.
현대는 물고기자리에서 물병자리[水甁座]로 옮겨가는 과정이며,
황도의 11번째 좌로서 한 남자가 오른손에 물병을 가지고 있는 것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즉, 물병자리시대(아쿠아리우스Aquarius시대)는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정신적 갈증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물병으로 상징되며, 인간 영혼의 참 자유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때라고 합니다.

뉴 에이지 운동가들은 점성학에 의해
양 자리는 성부의 좌(구약), 물고기는 성자의 좌(신약), 그리고 도래하는 물병자리는 성령의 좌(현대)로서, 뉴에이지는 새로운 영적 변형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 운동은 1900년 스위스 아스코나의 유토피아적 공동체인 진리의 산에 A.피오다가 평신도 수도원을 창설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창시하고 지도한 이들은 주로 과학자 ■심리학자 ■문학가들로 이루어진 평신도들입니다.
이들은 개인적 경험에 기반을 둔 반권위주의적 영성을 창조하려는 의도에서 동서양의 그노시스주의적 전통으로 물질주의에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종교와 문화와의 만남을 시도하였습니다(헤르만 헷세, 리처드 바크 등).
20세기 초에 활기를 띠고 나타난 캘리포니아의 에살렌과 스코틀랜드의 핀드혼도 이 운동의 주요 본부가 되고 있습니다.
이 운동의 기본노선은 '모든 것은 하나'라는 일원론(monism)입니다.
그들은 이 일원론에서 범신론이나 범내신론(panentheism)을 끌어냅니다.
신은 만물 안에 존재하고 만물은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동양의 종교 특히 힌두교와 불교의 영향과 심리학을 강하게 반영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 운동의 주요사상적 배경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인간의 초월능력에 대한 흥미를 돋구어 현대종교사회의 신 중심사상에서 벗어나 인본주의, 특히 우주적 인본주의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주된 관심사는 종교의 진리추구가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 안에 있는 무한한 잠재력과 신적 능력을 개발시켜 자기의 무지에서 해방되고, 치유 받으며, 결과적으로 종교를 인간의 필요와 상황에 따른 치료방법으로 변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뉴에이지의 운동의 흐름은 현대인의 생활 속에도 자연스럽게 파고들어 확산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클래식과 팝뮤직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뉴에이지음악은 심리치료, 스트레스해소, 명상음악 등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인간 의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장개발함으로써 신격화된 비신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배꼽》《히말라야 성자들》 등의 뉴에이지 계열의 책들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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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버리고 싶다

커피향 그윽한 이야기 2004. 12. 6. 09:52

우리는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간접경험을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간접경험이 아니고, 남의 인생 엿보기가 정답 아닐까..

그것은 하나의 유희일 뿐 아닐까..

부작용으로는,

그 작품의 결과를 알기 때문에 나도 비슷한 상황에 닥치면

막연한 두려움만 미리 간직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직접 느껴야지우리는 그 모든 것을 오래 간직하게 되고

몸소 경험을 해야지만 진정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아파야지만 성숙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과오를,

간접적으로 봐왔던 실수들을,

나 또한 벗어나지 못하며

인생을 아파하며 살게 되는것이다.

나도 그냥 여기저기 씌여있는 다른 사람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막을 한꺼풀 벗어버리고 싶다.

벗어버리고 싶다.

= 정말 싫은 변태 가면.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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